갓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요즘 같이 매일 수많은 정보가 떠오르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열심히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무언가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사유하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수 없이 반복되는 짧은 모든 것에 길들여져 내 감정이 어떤지 내 생각이 어떤지 단 한 시간이라도 돌이켜 본 적이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10여 년간 경비원일을 한 패트릭 브링리의 이야기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수많은 메트로폴리탄 경비원들처럼 그도 메트로 폴리탄의 경비원을 희망하고 일을 시작하진 않았다. 그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형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브링리의 형은 마음씨도 착하고 능력도 뛰어난 청년이었다. 이제 청년이 되어 보장된 미래에서 결혼까지 해서 앞으로 펼쳐질 탄탄대로의 삶에서 본격적인 삶을 시작하려는 기점에서 그는 암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 브링리 또한 뉴요커라는 직장에 들어가 큰 포부를 가지고 화려한 뉴욕에서의 삶을 시작하지만 형의 갑작스러운 투병으로 그는 형과 함께 밝은 미래에서 어둡고 우울한 작은 병실로 들어간다. 슬픔과 우울 그렇지만 가끔씩 터지는 행복과 웃음이 있는 작은 병실에서 형은 조용히 죽게 되고 형과 남다른 우애를 가지고 있던 브링리는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뉴요커에서 사직을 한다. 그리고 그저 무작정 서있는 단순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에 지원해 일을 시작한다.
브링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그의 바람대로 우두커니 서서 미술품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중간중간 형과의 일화도 떠올린다. 브링리가 우두커니 서서 미술품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보는 묘사가 굉장히 뛰어난데 그 묘사를 읽고 있자면 당장이라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가 그처럼 미술품과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나는 브링리가 수피파의 더비시를 그린 그림을 보는 부분이 좋았다. 그림에 적힌 신을 향한 날 선 비난(인간 본연의 슬픔)의 아랍어 문구에서 브링리는 자신의 슬픔과 고민을 생각한다. 그리고 출근길 사람들의 얼굴과 눈으로 세상을 보고 미술관에서 다시 수피파의 더비시를 그린 그림을 보며 브링리는 슬픔을 끝내고 앞으로 나아갈 두근거림을 느낀다.
상실의 슬픔을 애도하고 그 애도를 끝내고 다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은 다양하다. 맡겨진 소녀에서 부부는 소녀를 통해 애도를 끝 마쳤고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는 각기 신에 대한 다른 물음으로. 그날 저녁의 불편함에서 야스가 자신의 배에 압정을 꼽고 냉동고에 들어간 것처럼 슬픔을 소화하는 데는 각기 너무나 다른 시간과 방법이 필요하다. 브링리는 미술품과 사람들을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오래 지켜보며 애도를 끝냈다. 애도의 과정에서 브링리는 많은 것을 보고 깨닫고 변화했다. 가장 큰 변화는 가족의 탄생이다. 어찌 보면 슬픔은 또 다른 사람으로 잊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보단 매트로폴리탄에서의 시간과 예술품들이 브링리의 사고관이 더 다양하고 높은 층위로 발전시켜 주었고 그로 인해 애도를 끝내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은 온갖 풍파로 뒤흔들리고 얼룩진다. 하지만 시간은 무심히 계속 흘러간다. 시간을 멈출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그 시간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흔히 삶을 한 편의 영화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삶이 영화라면 영화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하나의 시퀀스를 끝내고 다음 시퀀스로 넘어가야 한다. 언제까지 하나의 시퀀스에 머무를 수는 없다.
모든 예술품은 어떠한 형태든 삶을 담는다. 만든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느꼈는지에 대한 시선이 있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부딪치고 실수하고 오류투성인 인간이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지만 직접 겪고 생각하는 것은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때문에 제일 쉽고 가성비 좋은 건 많은 예술품을 경험하는 것이다. 많은 예술품을 경험하다 보면 삶이 조금 더 나아지고 조금 더 좋아지는 쪽으로 변하지 않을까.
나누고 싶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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