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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 해석

#78. 부끄러움 - 아니 에르노. 서평(리뷰) 및 해석

by 까망북클럽 2024.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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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에 대해 이렇게 솔직하게 글을 쓸 수 있을까.

 

 

 
부끄러움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첫 문장만으로 전 세계 독자에게 충격을 선사한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아니 에르노의 여덟 번째 소설로, 열두 살 때 노동계층 부모와 기독교 사립학교 사이의 간극을 체험하고 존재의 불편함을 느꼈던 원체험(기억에 각인되어 영향을 받게 되는 어린 시절의 체험)에 대한 회고이다. 《단순한 열정》을 발표하고 한동안 윤리적 논란에 휩싸였을 때 자전적 서사 그 이상을 제시함으로써 모든 논란을 잠재우고 작가로서 일대 전환을 이루어낸 작품이다. 비채는 모던&클래식 시리즈를 통해 《부끄러움》을 내며, 이 작품이 작가 아니 에르노에게 갖는 의의를 소개한 신수정 문학평론가의 해제와 이재룡 숭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의 작품해설을 실어 이해를 도왔다. 또한 작가연보를 통해 데뷔 사십오 년에 이른 아니 에르노의 문학적 궤적을 정리했다. 오늘의 어법에 맞게 번역문을 세심히 다듬었으며 주석을 보강하고 표지 이미지를 통해 ‘원체험의 응시’라는 주제를 담담하고도 강렬하게 표현했다.
저자
아니 에르노
출판
비채
출판일
2019.04.22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 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같이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 은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라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책은 소설로 분류가 되어 있지만 전혀 소설과 같은 느낌은 없다. 그만큼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이 거짓 없이 투명하게 들어가서 아닐까. 책은 1952년 6월 15일 부모님의 다툼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해 끝을 맺는다. 보통 어린시절의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게 되면 흔히 정신분석이나 가족심리, 유년시절에 대한 스트레스 외상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영웅적 서사로 이어지기 마련이지만 아니 에르노는 책의 초반에 직접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것을 일축한다. 그저 1952년 6월 15일 이후로 촉발된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해 객관적인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부끄러움. 자신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그 부끄러움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삶에 깊게 자리잡은 6월 15일 일요일의 사건과 근원적인 부끄러움에 대해 나(아니 에르노)는 물질적인 흔적을 나열하듯 서술한다. 누구나 유년시절에 떠오르는 강렬한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그게 1952년 6월의 사건인 것 같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나는 무언가 삶의 양식(부끄러움)이 바뀐 것 같다. 그래서 그때. 1952년 6월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두 장의 사진과 남은 물건들 그리고 그 당시의 신문을 보면서 그 시절을 떠올리려 하지만 도시 이름조차 Y라고 언급될 만큼 나의 유년시절 도시와 일요일 사건은 어떤 객관적인 매체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결국 나는 기억을 떠올리며 물건을 늘어뜨려 놓듯 흔적들을 나열한다. 처음 늘어놓은 기억은 유년시절의 동네에 대한 기억이다. ’나‘는 Y라는 곳에서 식품과 봉제품을 파는 식당 겸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 아래서 자란다. Y의 삶은 대체적으로 옛날 우리나라와 비슷했던 것 같다. 의미는 같지만 표준어와 사투리 구분 지어 사용하고, 때가 되면 학교에 가고,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때가 되면 무언가를 하는 표준화된 삶의 양식을 따르는 삶. 개성은 일탈이고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살았던 삶. 심지어 동네 개들 이름조차 미케 아니면 보비였던 기독교 문화가 자리 잡은 표준화된 양식이라는 게 존재했던 생활양식이 자리 잡은 곳인 것이다

 

 ‘나’는 학교도 떠올린다. 기독교사립학교의 염격 한 학교 분위기에서 공부하고 기도에서 기도로 끝나던 삶에 대해 늘어놓는다. 엄격했지만 억압받는다는 느낌은 없이 나름 잘 지냈던 학교 생활. 친구와 선생님. 그러나 나는 기독교사립학교에서도 6월 일요일 사건에 대한 것을 찾지 못한다.




 6월의 사건 이후 할머니의 죽음과 이모의 구타 사건. 그리고 아버지와 떠난 성지 순례 여행의 기억의 끝에서 1952년의 나와 글을 쓰는 나는 점점 연결된다. 6월의 사건이 있고 이후 아버지가 또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는다. 사건은 그 자체로 이전과 이후에 어떤 영향도 없다.  6월의 사건은 이렇다 할 사건을 만들어내지도 신문이나 사진, 문서에 남을 흔적을 남기지는 못하지만 이 늘어뜨려 놓은 흔적들에게서 ‘나’는 6월의 사건이 남긴 부끄러움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과 계급의 불합리함, 집단 소외 같은 것이다. 작가의 부끄러움은 6월의 사건 그 자체가 아닌 6월의 사건으로 깨달아버린 프롤레타리아 세계와 부르주아 세계의 충돌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직장에 자리를 잡은 누나가 어린 글쓴이를 데리고 좋은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줬단다. 글쓴이는 누나에게 “왜 이렇게 비싼 곳에 와서 사주는거야?” 하고 물었고 누나는 “너는 나처럼 커서 실수하지 말라고 미리 알려주는 거야”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에르노나 어떤 인터넷에 나온 글의 누나나 비슷한 감정이었을까?

 아니 에르노나 그 누나나 지금은 그 가난했던 유년시절에 대한 것을 돌이켜보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자기연민에 빠질 일도 아니고 그 당시 일을 윤색할 것도 없다.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오는 충돌에 의한 그런 근원적인 부끄러움일 뿐이다. 아니 에르노가 책의 후반부 사라예보 사건에 대해 ‘부끄러움에 목이 멘다’라고 말한 작가들과 자신을 구별 짓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부끄러움은 거대한 어떤 충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삶의 연속성에서 느낀 모든 프롤레타리아들이 느꼈을 법한 영속된 근원적 부끄러움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과거(6월 사건)에서 촉발해 발생한 생활양식과 일상습관의 충돌에서 나온 근원적인 부끄러움을 서술했지만 그 부끄러움은 개인의 부끄러움도 아니고 그녀 개인만의 것도 아니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은 그녀와 비슷하게 가난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느꼈을 만한 집단적인 경험이다. 소설 ’ 부끄러움‘은 집단이 느낀 계급의 부조리, 가치의 충돌,  정체성의 충격을 대변한 가히 집단이 서술한 사회학적인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법하다.

아니 에르노 - 부끄러움 ★★★★


나누고 싶은 것들.
1. 나의 유년시절 강렬한 기억 하나.
2. 나의 삶에 방식이 된 감정이 있는가?
3. 불행을 벌었던 경험
4.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집단 창작 소설과 같은 것이다. 각자가 한 마디씩 더해서 한 사람을 만들어 내니까. 라는 것에 대해
5. 6월의 사건
6. 한 사건이 발생하고 다른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은 선행 사건의 영향을 무조건 받는다고 볼 수 있을까?
7. 회상도 체험이자 경험인가?
8. 두 세계의 충돌을 느낀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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