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그라들었지만, 한 때 국민 연예인 유재석 씨를 필두로 많은 사람들이 본모습과 다른 부캐 놀이에 열중했다. 유행처럼 많은 사람들이 부캐 놀이를 한 걸 보면 자신의 평소 모습과 다른 모습을 하며 모종의 해방감과 즐거움을 느낀 것 같다. 그만큼 현실의 본캐가 힘들었던 걸까. 혹은 나의 다른 면을 발굴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발산된 것일까.
자신의 평소 모습이라는 것을 정체성이라 한다면 부캐는 페르소나에 불과하다. 페르소나란 연극 탈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자신의 본성과는 다른 태도를 의미한다.
정체성이란 변하지 않는 고유의 형태일까. 만약 사람들의 개개인의 정체성이 변하지 않고 하나로 정의할 수 있다면 부캐는 페르소나가 분명하지만 간혹 부캐를 넘어 부캐가 본캐가 되는 이들을 보면 단순한 가면이 아니라 또 다른 자신의 정체성이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면 정체성을 하나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가족과 같이 있는 모습, 연인과 있는 모습, 직장에서, 친구와, 낯선 이와 함께 할 때 등 각각의 자신기 모습이 조금씩은 다르다. 낯선 순간이나 위기의 순간에서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나올 때도 많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런저런 합리화를 통해 어느 때나 자신의 모습은 항상 같다며 정체성을 견고히 다진다. 그러다 문득 어떠한 계기로 혹은 부캐놀이에 열중하다 정체성이 크게 흔들리는 순간이 종종 찾아오면 커다란 혼란과 함께 변화의 순간이 온다.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에는 샹탈과 장 마르크라는 두 인물이 나온다. 이 둘은 연인으로 파리에서 생활하다 노르망디 해변가 작은 도시에 휴가를 떠난다. 샹탈은 해변가에서 '아무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 같다'라고 느끼며 서글픈 마음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이 말을 연인인 장 마르크에게 꺼내고 당황한다. 이 말을 들은 장 마르크 또한 어이없어 하지만 이내 숨기고 샹탈을 위로한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뒤 장 마르크는 샹탈을 위로해주기 위해 작은 장난을 친다. 마치 모르는 누군가 그녀를 연모하는 것 마냥 거짓 편지를 샹탈에게 보낸 것이다. 샹탈은 이 편지를 받고 당황하면서도 설렘을 느껴 장 마르크 몰래 편지를 보관하기 위해 속옷 밑에 숨겨둔다. 그런 샹탈을 보고 장 마르크는 그녀를 완벽히 속였다는 자부심과 동시에 거짓 편지의 발신자인 가상의 인물에게 질투를 느낀다. 장 마르크의 편지 장난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샹탈은 편지를 보낸 이가 장 마르크임을 서서히 눈치채고 편지를 둘러싼 둘의 긴장과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갈며들며 이야기는 흘러간다.
얼핏 보면 연인 간의 장난과 질투, 권태에 관한 이야기 같지만 이 책은 제목처럼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다. 책은 샹탈과 장 마크르크의 대비로 둘이 정체성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확인하며 과연 정체성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독자에게 붇는다.
책을 보면 장 마크르는 샹탈에게 굉장히 의존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자아 정체성이 남과 구별할 수 있는 자신의 독립적인 본질 혹은 속성이라 할 때 장 마르크는 그것을 자기 자신을 통해서가 아닌 샹탈을 통해서 확인하려 한다. 그래서 그는 해변가에서 그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알고 보니 낯선 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샹탈의 직장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장 마르크는 혼란을 느낀다. 샹탈이 자신의 직장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혹은 직장에 있을 때와 장 마르크와 함께 있을 때의 모습이 현격히 다르기 때문이다. 장 마르크에게 있어 샹탈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녀가 변하거나 사라지는 것은 장 마르크에게 있어 정체성의 붕괴를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다. 그렇다면 샹탈과 만나기 전에는 어땠을까? 장 마크르는 친구 F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다. 친구를 만나기에 앞 서 장 마르크는 샹탈에게 친구를 만나는 이유는 자아의 총체성. 즉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샹탈 이전에는 친구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 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친했던 친구의 죽음 앞에서 그는 굉장히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과거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경험 때문이다. 그 충격으로 그는 F와의 추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F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둘의 과거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는 듯 냉소적인 태도만 보인다. 이제 더이상 친구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는 장 마르크는 병문안을 마치자마자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바로 샹탈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다.
샹탈 또한 장 마르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을 통해 확인하려 한다. 가령 샹탈은 장 마르크의 장난스러운 편지 때문에 평소라면 생각지도 않았을 행동을 한다. 편지를 보낸 남자라고 생각한 거지에게 다가간다던가 평소 자기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던 액세서리를 하는 등의 행동을 한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 생각 등 자신의 정체성이 아닌 행동과 특성을 보인 것이다. 만약 샹탈이 자기 자기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본인을 통해서 확인했다면 샹탈의 행동은 말이 안 된다. '아무도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 것 같다'라는 말부터 거짓 편지에 대한 반응까지 샹탈 또한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의 혼란 끝에 귀결하는 둘의 태도는 현격히 다르다. 둘의 대비는 샹탈의 과거에서 알 수 있다. 거짓 편지로 둘이 오묘한 냄새를 풍기고 있을 때 샹탈과 장 마르크가 살고 있는 집에 샹탈의 전 남편 시누이가 불쑥 찾아온다. 그리고 시누이의 느닷없는 방문에 샹탈은 자신이 왜 이혼을 했는지 떠올린다. 과거 샹탈은 가족주의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다. 감시당하는 기분,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로 묶여 있는 것 같은 삶 속에서 샹탈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이혼하고 다른 사회로 나온 것이다. 그때의 경험을 다시 떠올린 샹탈은 전 남편의 시누이를 내쫓듯 쫓아내고 자신의 물건을 몰래 뒤진 장 마르크에게서 과거 전남편의 가족들에게서 느꼈던 기분을 떠올린다.
결국 장난스러운 편지를 둘러싼 갈등은 끝내 관계의 파열을 가져온다. 장 마르크는 과거 F와 그랬듯 자신의 정체성이 침범받거나 훼손된다고 생각하면 그 관계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F와의 병문안 이후 샹탈을 그리워하는 것에서 그 태도가 보인다. 샹탈 또한 장 마르크와 마찬가지로 타인을 통해서 정체성을 찾으려 하지만 그녀 또한 자신의 정체성이 침범받거나 훼손된다고 생각하면 기존 관계를 끊어 낸다. 장 마르크와 다른 점이라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새로운 관계를 찾기보다는 타인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며 정체성을 찾으려고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타인을 통해서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둘은 같지만 귀결되는 과정과 결말은 다르기에 둘은 관계에서, 정체성에서 크게 지각변동을 느끼고 꿈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꿈으로 혹은 정신세계로의 유영을 하다 결국 이별하고 만다.
분명 나라는 사람은 존재하는데 결국 상대가 없다면 자아정체성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이라고 믿었던 것이 흔들리는 순간 과연 나라는 존재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맞는지 아니면 내가 나라고 믿고 싶었던 것인지 참으로 알쏭달쏭하다.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끝내 자기 자신을 통해서 정체성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일까. 다만 사람들에게 하나의 문화처럼 부캐놀이가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 깨달아 가는 과정이 되는 것을 보면 참 재밌다. 밀란 쿤데라 선배의 정체성은 어렵지만 유재석의 부캐 놀이는 쉽다.
정체성의 아이러니.
밀란 쿤데라 ㅡ정체성
나누고 싶은 것들
1. 나의 부캐
2. 정체성이란
3. 나의 정체성을 설명한다면?
4. 정체성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5. 관계와 정체성
2022 - 작성
2023.01.09 - 1차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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