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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 해석

#61. 그날 저녁의 불편함 -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서평(리뷰) 및 해석

by 까망북클럽 2024.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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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의 불편함
2020년 8월 26일,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비대면으로 치러진 부커 인터내셔널 시상식. 다니엘 켈먼, 오가와 요코, 사만타 슈웨블린 등 쟁쟁한 작가를 제치고 낯선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바로 스물아홉 살 네덜란드 작가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다. 2016년 이 상을 수상한 한국의 한강 작가, 2017년 수상자인 이스라엘 문학의 거장 데이비드 그로스먼, 노벨문학상까지 휩쓴 2018년 수상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인터내셔널 부커상은 주로 자국에서 탄탄한 기반을 가진 작가에게 수여되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의 불편함》은 작가의 첫 소설이었고, 수상 이력도 많지 않았다. 역대 최연소 수상자를 낸 네덜란드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고 언론은 ‘깜짝 수상’이라며 취재에 열을 올렸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은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가 스물일곱 살에 발표한 첫 소설이다. 이 작품으로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했지만, 그의 가족은 아직 이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레이네펠트는 “(내가 부커상 후보에 오르고) 온 동네 사람들이 내 책을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나의 가족은 너무나 두려워 내 책을 읽지 못했다”며, “작가가 태어나는 것은 사실 집안의 불행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 속 야스의 가족처럼 작가의 가족도 농사를 짓고 목축을 했으며 성경 말씀을 철저히 지켰다. 그리고 작가 역시 세 살 때 오빠를 잃었다. 그 상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무려 6년에 걸쳐 집필한 소설이 바로 《그날 저녁의 불편함》이다. 가족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그의 소설만은 아니었다. 레이네펠트는 젠더퀴어로서 자신을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넌바이너리’로 선언했다. 중간이름 ‘뤼카스’ 역시 스스로 붙인 것이다. 이 또한 가족에게 수용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글을 쓰면서 시작된 변화는 작가를 성장시키고 단련시켰다.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갖고 노는 일이다. 랩톱 컴퓨터 앞에 있을 때 나는 비로소 강해진다.” 세계가 주목하는 새로운 목소리는 이렇게 탄생했다.
저자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출판
비채
출판일
2021.11.22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잘 위로해 주고 같이 울어주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나는 좀처럼 타인의 슬픔을 잘 위로하지 못한다. 나의 어설픈 위로가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더 주진 않을까라는 걱정도 있고 나의 눈물이 자칫 오해를 사거나 거짓처럼 보이지는 않을까란 우려 때문이다. 적절한 위로도 하지 못하니 슬픔을 논하거나 이해하려는 척도 할 수 없다. 개중에 타인의 슬픔을 이해한다고, 당신을 모두 이해한다며 슬퍼하는 사람에게 슬픔의 이유를 설명하고 해결방안(?)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슬픔을 설명하고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란 게 진짜 있을까. 나는 그런 건 없다고 본다. 슬픔 중에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슬픔의 이유를 설명한들 상대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 은 독실한 개신교 집안의 가족 이야기다. 4명의 자녀를 둔 부부는 젖소를 키우며 조금은 부족하지만 신앙심을 가지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첫째 아들인 맛히스가 얼어붙은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다 얼음이 깨져 호수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맛히스의 죽음으로 이 가족은 생기를 잃고 어둠 속에 빠진다. 그리고 책은 셋째인 야스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어떤 위로가 위안이 될까. 나이가 들어 죽는 것도 아니고 병이 들어 죽는 것도 아닌 갑작스러운 아들의 사고사로 온 가족은 혼란을 겪는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거야."라고 믿던 가족들은 이 또한 무언가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생을 이어가려 한다. 하지만 신앙심은 이 가족들에게 위안도 설명도 되지 않는다. 신앙은 이 가족에게 "그저 인간은 이해못할 뜻이 있다." 라고만 말할 뿐이다. 신앙에 기대어 이 슬픔을 이해해보려 노력하지만 가족은 전혀 위안받지 못하고 조금씩 삐걱거린다.

  엄마는 도통 먹지 않아 체중이 점점 줄고 아버지는 항상 풀이 죽어 있는 상태로 산다. 형제들은 침대나 벽에 머리를 박는 버릇이 생겼다. 야스는 생리현상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코트를 한 번도 벗지 않은 채 생활한다. 신앙으로도 가족의 비통함이 좀처럼 끝나질 않으니 마음의 상처가 외부로 표출되는 것이다. 부모는 서로에게 상처의 말을 던지고 자연스레 남은 자녀들은 방치된다. 점점 자라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신경 쓰지 못하는 부모와 슬픔과 갈등에 빠진 가족 환경은 악영향을 미친다. 야스의 오빠인 오버는 작은 생물체들을 쉽게 죽이고, 하나와 야스는 코를 파서 먹거나 성에 집착하는 등 만연한 불안이 외부로 표출된다.

 

 

 신은 이 가족들에게 어떠한 구원의 손길도 내밀지 않지만 악마는 수렁에 빠져있는 이들을 너무나 손쉽게 더 깊은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위태롭던 가정에 두 번째 불행이 찾아온다. 구제역이 발생하여 야스 가족의 젖소들을 모두 살처분해야 되는 것이다. 맛히스의 죽음도, 젖소의 죽음도 종교가 이야기해 주는 것은그저 인간은 이해 못할 뜻이 있는 일이라는 말 뿐이다.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주던 젖소들마저 죽을 위기에 처한 야스의 아버지는 남은 가족들의 생계마저 위협받자 "악에 당하지 말고, 악을 선으로 이기십시오"라는 목사의 외침에 "목사들이 그 원인이잖습니까!"라며 분노를 터트린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분노를 다른 사람들은 외면한다. 야스의 어머니마저 그저 슬픔에 빠져 도망칠 뿐 그 누구도 이 가족의 슬픔에, 아버지의 분노에 공감하지 못한다.

 고통과 슬픔과 같은 감정들은 왜 생겨나는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슬픔과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온전한 휴식과 주변 사람의 포옹뿐이다. 이 가족에게는 온전한 휴식도, 포옹도 없으니 회복은 커녕 점점 극적으로 변해간다. 아이들은 폭력적으로 변하고 부모는 고성을 지르며 다툰다.

 

 그때 처음으로 이 가족에게 슬픔에 대해 묻는 사람이 등장한다. 젖소 때문에 야스네 가족에 방문한 수의사는 야스에게 "오빠가 그립니?"라고 물으며 그녀의 슬픔에 대해 묻는다. 책을 통틀어 이 가족에게 슬프니?라고 묻는 첫 사람이 책의 마지막에서야 등장한 것이다. 그때 야스는 처음으로 자신이 오빠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고, 아직도 슬픔에 빠져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극적인 상황까지 와버렸다. 자신이 슬퍼하는 것을 모르는 것만큼 슬픈 것이 있을까. 이제서 슬픔을 인지한 야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녀는 항상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맛히스 오빠가 살아있던 그때. 가족이 화목했던 그때의 자기 자신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자신의 배꼽에 압정을 꼽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금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결정을 한다. 마지막 순간 야스는 맛히스와 같이 차가운 곳으로 지금의 지옥과 같은 상황이 없는 곳으로. 예전으로 가기 위해 냉동고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본인이 슬픔에도 그 슬픔을 모른다는 것만큼 비통한 것이 있을까. 슬프면 슬퍼해야 하는데, 다 뜻이 있다고 운명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만큼 더 큰 고통은 없다. 신앙은 인간을 고통과 슬픔에서 구원을 해 줄 수 있을까. 자연사와 병사가 신의 뜻이라면 갑작스러운 사고사는 무슨 뜻일까. 사고사가 죄의 값이라 한다면 태어난 지 얼마 안돼 죄를 저지를 겨를도 없었을 아기의 죽음도 죄의 값인가? 신은 도대체 무얼 하는 걸까?

 

이제 보면 위로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은 내가 슬픔을 잘 알지 못해서인 것 같다. 

슬픔을 모르는 슬픔. 슬픔을 이해하려는 행위와 노력이 오늘 더 먹먹하다.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그날 저녁의 불편함 ★★★☆

 

 

나누고 싶은 것들.

1. 슬픔의 감정

2. 신앙과 슬픔

3. 위로하는 방법

4. 성장기 아이에게 가정이 끼치는 영향

5. 영화 밀양과 그날 저녁의 불편함

6. 나의 슬픈 경험

7. 슬픔을 위로하거나 이겨냈던 경험.

 

 

2022 - 작성

2023.01.11 - 1차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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