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한 가지 버릇이 있는데 주말 밤 잠들기 전 시간이 남을 때마다 OTT를 통해 내가 재미있게 봤던 영화 장면을 돌려보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보기 전까지 그 자리를 대부분 차지했던 건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였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다시 되돌려 볼 때마다 본 장면 중 하나는 바냐 아저씨 공연을 연습하는 장면과 마지막 바냐 아저씨를 공연하는 모습이다.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읽게 된 건 그런 의식의 흐름이 이어진 결과다.
바냐 아저씨의 무대 시작은 세레브랴코프의 별장.
세레브랴코프 교수는 퇴직 후 그의 젊고 아름다운 두 번째 부인인 엘레나와 함께 별장으로 오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의 첫 째 부인 사이에서 낳은 딸 소냐와 그녀의 삼촌인 바냐를 비롯한 별장의 인물들과 부딪치며 갈등을 겪게 되고 모종의 사건을 통해 다시 별장에서 떠나는 것이 이 극의 내용 전부다. 이 극을 보는 내내 드라이브 마이 카와 연관지어 볼 수밖에 없었고, 드라이브 마이 카와 바냐 아저씨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를 후반부에서야 느꼈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마지막 부분이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을 공연하는 주인공의 모습인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이반 페트로비치)는 세레브랴코프가 돌아온 후 삶의 엄청난 회의와 상실감을 느낀다. 교수가 오기 전 바냐는 자신의 조카인 소냐와 어머니 마리야와 같이 세레브랴코프 교수를 존경하고 그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며 그에게 돈을 보내왔다. 그러나 교수가 퇴임하고 별장에 돌아오면서 자신이 교수에게 보냈던 돈과 존경은 허황된 것이며 교수에게는 심술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보고 인생의 굉장한 허무함을 느낀다. 그 와중에 바냐는 교수의 젊고 아름다운 두 번째 부인인 엘레냐에게 마음을 뺏기는 오묘한 감정을 갖게 된다.
바냐의 허무함과 무력감은 인간이 이상과 실체의 불일치를 느꼈을 때 경험하는 감정이다. 인간은 이상을 꿈꾸고 그에 대한 찬사와 열정을 쏟지만 만약 그 이상의 실체가 별볼일 없을 경우 굉장한 허탈감을 경험한다. 교수가 눈 앞에 없었을 때는 몰랐지만 그가 눈에 보이자 바냐는 알아채 버린 것이다.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이상은 별 볼 일 없는 일이었음을, 평생 열정을 쏟았던 일이 사실은 하찮고 쓸모없는 행위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허탈함과 좌절을 느낀다. 그런와중에 오묘하게도 바냐가 교수의 부인인 엘레냐에게 마음을 뺏기는 것은 좌절에서 벗어나기 위한 피난처를 찾는 행위이자 그럼에도 새로운 이상을 찾고 싶은 인간의 몸부림으로 보인다. 체호프는 이상에 상처받고 실망하면서도 새로운 희망과 이상을 품으려는 모순적인 인간의 태도를 바냐의 복잡한 감정으로 보여준다.
바냐의 이런 오묘하고 복잠한 심정은 교수의 선언으로 폭발하고 만다. 교수는 바냐를 비롯한 별장의 인물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영지를 팔고 다시 도시로 나가겠다는 선언을 한다. 정신적인 좌절과 허탈감 그리고 피난처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던 바냐는 자신의 생계수단까지 잃어버리는 지경에 오자 분노에 못 이겨 교수를 향해 총을 쏜다. 바냐의 이런 극단적인 선택은 실패한 자신의 이상과 희망을 종결시켜버리고자 하는 극단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바냐의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더욱더 좌절하여 자신을 파괴하고자 자살까지 꿈꾸지만 자신의 조카 소냐의 설득과 포용으로 자살하기로 했던 마음을 버리고 계속 삶을 영위해 나가기로 결정하고 교수와 교수의 부인은 그냥 영지를 떠나기로 한다.
이런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바냐의 어머니이자 교수의 장모인 마리야는 교수에게 계속 지지를 보낸다. 그녀는 이상이 허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교수를 지지하며 그를 통해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구시대적인 인물이다. 반면 소냐는 현시대의 인물인 바냐와 구시대적인 인물인 마리야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 즉 미래 시대의 인물이다. 그녀는 우리의 이상이 허황되고 실패했더라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바냐뿐아니라 우리에게 계속 말한다. 바냐 아저씨의 주된 메시지는 우리 삶이 때론 힘들고 고달파도, 우리가 꿈꿔온 이상과 꿈이 알고 보니 헛된 것임을 알게 되더라도 우린 계속 살아가야만 하며 또 다른 미래의 희망을 꿈꾸자는 것이다.
극의 마지막이자 드라이브 마이 카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냐가 삼촌 바냐를 안아주며 하는 대사는 드라이브 마이 카와 바냐 아저씨의 전체 내용을 통괄하는 대사이자 안톤 체호프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살아야죠! 삼촌,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을 끝까지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꾹 참아 나가는 거예요.
- 중략 -
불쌍한 바냐 삼촌, 울고 계시군요. 삼촌은 평생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살아오셨죠. 하지만 기다려요, 바냐 삼촌, 기다려야 해요. 우리는 쉴 수 있을 거예요. 쉴 수 있어요. 쉴 수 있어요.
구시대와 현 시대의 좌절과 갈등, 충돌 그 극단에서 미래 시대의 인물이 모두를 포용하는 것으로 극은 이 모든 갈등과 불화를 용해시켜 버린다. 그렇다고 이 모든 역할과 책임을 미래 세대에게 지우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 모두 계속 살아가고 미래의 행복을 희망하며 지내자는 제의를 한 것이다.
바냐 아저씨는 시대에서 단체, 단체에서 개인까지 이상과 현실, 희망과 실망 사이의 갈등과 모순을 통해 인간의 삶과 본성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하게 한다. 고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개인적인 메시지도 있다. 이야기가 너무 간단하고 내용도 특별할 것 없지만 많은 위대한 작품은 별 것 없는 내용으로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다.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는 100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 넘어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영감을 주었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작품으로 하마구치 류스케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안톤 체호프에서 하루키를 이어 자신의 작품 드라이브 마이 카를 만들었다. 그다음의 바통은 누가 이어받을까. 궁금하다.
Finita la Comedia! 그래도 살아가야지.
바냐 아저씨 - 안톤 체호프 ★★★★
나누고 싶은 것들.
1. 각 등장인물들
2. 드라이브 마이 카와 바냐 아저씨, 바냐 아저씨 연극
3. 꿈꾸던 이상이 좌절된 경험
4. 이상과 현실
5. 바냐의 모순적인 감정에 대해.
6. 바냐 아저씨가 쓰인 당시의 시대와 바냐 아저씨
2023.05.26 - 1차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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