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쫀쫀한 책을 만났다. 글의 짜임도 읽히는 속도도 좋다. 마치 경기병들이 달가닥 달가닥 경쾌하게 발을 구르며 나아가는 것처럼 술술 읽혔다.
예전에 읽은 스릴러와 추리소설들 중에 떡밥을 제대로 회수 못하거나 뒤로 갈수록 설정붕괴가 일어난 책들 때문에 실망한 적이 많아 책을 고를 때 스릴러나 추리소설 장르는 잘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르다.
누군가 스릴러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바로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핑거스미스'는 로맨스(레즈비언) 소설이자 페미니즘 소설이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나 한국의 막장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책이다.
책의 구성은 총 1부, 2부, 3부로 1부와 2부의 화자는 다르지만 시간의 흐름은 같으며, 3부는 1부의 화자가 재등장해 이야기의 대단원을 이룬다.
1부는 수전 트린더 혹은 스미스라고도 불리는 수의 성장과 음모의 시작이다.
수는 고아들을 맡아 키우는 석스비 부인과 장물아비인 입스씨 그리고 데인티와 존과 가족을 이뤄 지낸다. 그들은 서로 혈육이나 결혼 관계로 묶이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불법적인 일을 하고 도우며 살아간다. 수는 여러 고아들 중에서도 어려서부터 석스비 부인에게 남다른 대우와 애정을 받으며 자라는데, 어느날 속칭 젠틀먼(리처드 리버스)이라고 불리는 사내가 집에 나타나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젠틀먼은 브라이어 저택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에 삼촌의 보호 아래 있는 순진한 여자가 한 명 있다며, 그 여자에게는 막대한 유산이 남겨져 있지만 결혼 전까지 그 유산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수에게 그 여자가 자신과 결혼하게 끔 도와주면 큰 돈을 벌게 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젠틀먼은 그녀의 유산을 전부 가로채기 위해 결혼 후 바로 그녀를 심신 미약으로 정신병원에 넣을 속셈이었다. 수는 평소 석스비 부인에게 신세를 갚고 싶기도 했고 항상 할일 없이 집에만 있던게 불만이었던 터라 드디어 자신이 활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제안을 받아들이고 브라이어 저택으로 들어간다.
수는 브라이어 저택에서 스미스라는 가명을 쓰고 저택의 주인 크리스토퍼 릴리의 조카이자 작전의 대상인 모드 릴리의 하녀로 일을 시작한다. 젠틀먼이 오기 전까지 그녀와 깊은 친분관계를 쌓으려던 수는 친분을 넘어 모드에게 설렘과 사랑을 느끼고 자신의 계획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던 찰나 젠틀먼이 등장함에 따라 사랑의 감정을 억누르고 계획을 그대로 실행한다. 수는 친분관계를 이용해 모드에게 젠틀먼과 결혼을 하라며 부추기고 모드는 그런 수의 부추김과 젠틀먼의 적극적인 태도에 크리스토퍼(삼촌) 몰래 야반도주를 하여 결혼식을 올린다. 계획대로 결혼식까지 마친 젠틀먼은 이후 수와 함께 모드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으려고 하고 심신미약 판단을 받은 모드가 정신병원에 들어가야하는 순간 정신병원의 간호사와 의사들은 모드가 아닌 수를 붙잡고 정신병원에 넣는다.
수는 자신이 아닌 모드를 데려가야 한다고 외치지만 간호사와 의사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수를 억지로 잡아 끌고 가고 수는 당황해 모드와 젠틀먼을 돌아보게 되는데 그 곳에는 "마님. 가엾은 우리 마님.." 하고 수를 향해 외치는 모드와 그녀를 외면하는 젠틀먼이 있었다.
2부는 모드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모드는 어려서부터 정신병원에서 자라다 삼촌에 의해 병원을 나와 브라이어 저택에서 삼촌을 도우며 자란다. 모드의 일은 삼촌의 음란한 서적들을 정리하고 관련된 글을 쓰고 읽는 일이다. 모드의 삼촌은 영국 각지에서 쾌락과 정욕이 가득한 음란한 책을 모으고 이를 찾는 손님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젠틀먼도 그 손님 중 한 사람이었다. 모드를 본 순간 젠틀먼은 모드의 삼촌 재산을 빼앗을 수 있는 계략이 떠올랐다. 삼촌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던 그녀를 이용할 계략이었다. 그는 모드에게 자신이 순진한 도둑 한 명을 꾀어 올 테니 그녀를 모드인 것처럼 꾸민 다음 정신병원에 넣고 삼촌의 유산을 모두 상속받아 그 돈을 가지고 런던에서 자신과 살던 혼자 살던 자유롭게 살자고 제안했다. 평소 삼촌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모드는 이를 받아들였다. 수와 마찬가지로 모드 또한 자신의 계획을 위해 수와 친분을 쌓기 위해 호감과 애정을 표시하며 지냈고 그녀 또한 수와 마찬가지로 친분을 넘어선 설렘과 사랑을 느꼈다. 계획에 앞서 그녀 또한 수와 똑같은 고민에 빠진다. 사랑이냐? 자유냐? 그 고민을 하던 와 중 젠틀먼이 등장하고 모드는 자유를 위해 사랑의 감정을 누르고 계획을 수행한다. 계획에 성공한 모드는 런던에서 약속된 호화로운 생활과 자유를 누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젠틀먼은 그녀를 석스비 부인이 있는 집으로 데리고 온다. 처음 보는 석스비부인의 이상한 친절과 약속과 다른 젠틀먼의 태도에 모드는 그 집에서 탈출을 감행하기도 하지만 외톨이인 모드는 다시 석스비 부인이 있는 집으로 돌아와 감금당한다.
3부는 정신병원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며 고통받던 수가 저택의 시종이었던 찰스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면서 시작된다. 수는 찰스와 같이 런던으로 돌아가 모드에게 복수하고 젠틀먼의 계략을 석스비부인에게 폭로하려 한다. 모드가 석스비 부인의 집에 있는 것을 알게 된 수는 기회를 노려 석스비 부인에게 이 모든 것을 알리기 위해 가는데, 석스비 부인은 수의 폭로에도 이상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던 중 갑작스런 젠틀먼의 등장으로 그동안 감추어 왔던 비밀이 밝혀진다. 한국에서는 너무 흔해 시시하기 그지없지만 사실 모드는 석스비 부인의 딸이었다. 크리스토퍼 릴리의 동생인 수의 엄마 릴리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수를 임신을 했고, 엄한 가문을 피해 석스비부인에게 까지 왔다. 여기서 수의 엄마 릴리는 석스비 부인과 계약을 한다. 수를 가문의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게끔 도와달라는 것과 수를 대신해 가문에 잡혀갈 여자아이를 보내달라는 것. 이것을 지켜주면 수가 성인이 되는 날 자신의 이름으로 남긴 유산을 수와 석스비부인에게 나누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이 모든 음모의 시작은 석스비 부인의 계략이었다. 출생의 비밀과 음모의 전말이 뒤섞여 있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누군가의 총에 맞아 젠틀먼은 죽게 되고 석스비부인은 자신이 젠틀먼을 죽였다고 자백하며 교수형을 당한다. 모드는 다시 브라이어 저택으로 가고, 수는 석스비부인의 끝을 지켜보고 런던을 떠나 브라이어 저택에 모드를 만나러 간다. 크리스토퍼 릴리도 죽고 텅 빈 브라이어 저택에서 모드와 수는 재회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 책의 음모와 떡밥 그리고 상징들은 하나하나 버릴 것이 없고 흥미진진하다. 핑거 스미스에는 올리버 트위스트 나 데미안의 모티브도 있고, 흔한 클리셰인 출생의 비밀도 있다. 마지막 순간에는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헤이트풀8의 마지막 부분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그와 동시에 페미니즘 책이자 레즈비언의 사랑 이야기, 정체성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보통 많은 수식어가 붙으면 이도 저도 아닌 소설이 되어버리지만 이 책은 그만큼 다양한 것을 느끼게 해 준다.
핑거스미스에서 등장하는 남자들은 모두 다 뒤틀린 욕망과 비열함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릴리와 런던의 신사들은 겉으로는 고고한 척하지만 음란한 책들을 탐닉하며 그것을 모드에게 읽게 하고 거기서 만족감을 느낀다. 모든 원흉인 수의 아버지와 모드의 아버지는 등장조차 하지 않고 책임감 없이 도망간 것으로 나온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 사건이 터졌을 때 남자들은 도망가기 바쁘고 이 모든 것은 석스비 부인이 끌어안는 것으로 수습된다.
비록 본인이 음모를 꾸몄지만 결국 그것을 다 끌어안은 석스비 부인에게서는 책임감이 느껴졌고, 억눌린 저택에서 나오려는 모드는 마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이 책의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현재의 상황을 이겨내려는 노력과 증오 속에서도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다. 마지막에 수와 모드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함께 사는 것으로 행복한 결말을 맺게 되는데 진정한 여성의 승리이자 사랑의 승리라 본다.
어릴 적 수와 모드가 바뀌면서 둘의 운명이 갈라지고 다시 둘이 재회하며 운명이 뒤바뀌는 과정에서 자신을 누군가에게 증명한다는 점도 참 아이러니하고 재밌었다.
정신병원에서 수는 자신이 모드가 아니고 수라고 하지만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의 증명이 가능한 것인가? 내가 나 자신이라고 누군가에게 말해도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거야?"라고 한다면 "나는 나니까."라고 외칠 뿐이지만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주민등록증 혹은 타인의 증명을 통해서만 나 자신은 나를 증명할 수 있다. 매번 정체성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는데, 나의 일관됨 혹은 나라는 존재를 나로 증명하지 못하고 결국 타인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오묘한 기분이었다.
책에 나오는 다양한 비유와 중세 시대의 디테일함. 여러 가지 모티브와 상징들을 이야기하면 끝이 없다. 이 책을 모티브로 한 영화도 나왔지만 영화보다 책이 더 재미있었다.
속고 속이는 음모와 사랑. 출생의 비밀. 종합 선물세트 같은 책
세라 워터스 - 핑거 스미스★★★★
나누고 싶은 것들.
1. 여러 가지 모티브(데미안, 올리버 트위스트, 피그말리온 등)
2. 중세 시대
3. 사랑과 일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4. 이 책에 나오는 상징들
5. 자아정체성
6. 상대 마음을 덜 아는 사람이 불리 할 수 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
7. 경쾌한 문장과 전개란?
8. 한국에서는 너무 흔한 출생의 비밀
9. 영화 아가씨
10.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특유의 긴장감
2021 - 작성
2022.11.09 - 1차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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