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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 해석

#29 이방인 - 알베르 카뮈. 서평(리뷰) 및 해석

by 까망북클럽 2024.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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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1942년 『이방인』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젊은 무명작가에 불과했다. 낯선 인물과 독창적인 형식으로 현대 프랑스 문단에 이방인처럼 나타난 이 소설은 출간 이후 한순간도 프랑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진 적이 없는 걸작이 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겪으며 정신적인 공허를 경험한 당대 독자들에게 카뮈는,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관습과 규칙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현실에서 소외되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마주하는 실존의 체험을 강렬하게 그린 이 작품은 아직까지도 전 세계 독자들 사이에서 고전 중의 고전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민음사에서는 불문학 최고의 번역자 김화영 교수가 이십 여년 만에 원문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오늘의 독자들에게 보다 친근한 언어로 “새로 번역하다시피 대폭 수정”한 원고를 ‘세계문학전집’ 266번으로 출간함으로써 『이방인』이 독자들에게 보다 깊은 감동을 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저자
알베르 카뮈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19.09.02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독자들에게 인상 깊었던 소설의 첫 문장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는 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다. 설국의 첫 문장이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문장의 아름다움,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면도 있지만 이방인의 첫 문장은 결이 다르다. 이방인의 첫 문장은 소설이 끝을 맺고 나서야 아름다움이 보인다.


나는 이 책이 나온 1942년도의 사람들이 책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았는지 너무 궁금하다. 이방인은 그때보다는 요즘에 나왔어야 더 잘 어울린다. 나는 무지렁이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말하는 카프카적이라던가 사르트르, 딜레탕트 같은 말을 쓰면 잘 모른다. 그래서 그들의 서평은 읽을 생각도 안 했고 다른 사람들의 리뷰도 몇 개 보려 했는데 어려운 말이 너무 많아 이해하지 못했다. 어려운 건 잘 모르겠고 그저 요즘 세대들의 모습을 뫼르소에게서 느꼈다. 요즘 세대들의 모습과 일치하는 뫼르소의 모습은 따뜻한 무관심과 소극적인 표현이다.







따뜻한 무관심이 무엇인가?

따뜻한 무관심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자칫 따뜻한 이 들어가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무관심이 깔려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공감을 하거나 위로하지도 않는다.

 

내 생각에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관심을 갖고 그에 따라 공감을 해주거나 위로를 하거나 같이 기뻐해 주는 등의 행동을 했다. 그러나 요즘 세대들은 관심을 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을 더 선호하고 이를 배려라고 생각한다. 섣부른 공감이나 해석보다는 무관심으로 행하는 것이다.
소극적 표현이라니? 요즘 같은 시대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요즘은 표현을 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표현을 하더라도 좋은 면만 표현한다. 우울이나 슬픔, 공허함, 상념 등은 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것이나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표현을 했을 때 오는 부정적인 면(피곤, 공격 당)이 긍정적인 면보다 커서다. 그래서 요즘 들어 유독 부정적인 면이나 자신의 생각에 대한 표현을 꺼리는 것 같다.




 책은 1부와 2부로 어머니의 죽음. 뫼르소의 살인. 뫼르소의 사형. 3가지 죽음을 포인트로 흘러간다. 첫 번째 죽음은 책 외부의 죽음으로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지배하고 있고, 두 번째 죽음은 이야기에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지배하지 못한다. 세 번째 죽음은 아직 미 실현된 미래의 이야기다.

 

 이 책을 지배하는 것은 온통 죽음이다.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1부의 시작에서 뫼르소의 어머니는 죽는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뫼르소는 슬퍼하기는커녕 애매한 행동을 보인다. 사람들은 그런 뫼르소를 보고 의구심을 갖는다. 응당 자식이라면 부모의 죽음을 슬퍼해야 정상인데 뫼르소는 슬픔보다는 피곤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례식 이후 슬픔에 빠져있지 않고 연애를 새로 시작하거나 사교활동을 한다. 그런 와중에 뫼르소는 우연히 햇빛 때문에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다.


2부는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 뫼르소에 대한 재판이다. 아랍인을 왜 죽였냐는 질문에 뫼르소는 태양 때문이라고 답한다. 누구나 당연히 사람을 죽였으면 무언가 동기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뫼르소의 행동을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검사와 판사는 뫼르소를 이해하기 위해 어머니의 죽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의 죽음과 뫼르소의 태도를 통해 판사들이 이해한 뫼르소는 파렴치한이고 사이코패스다. 따라서 검사와 판사는 뫼르소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뫼르소는 남들을 설득시켜 사형을 면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항변하지 않는다. 뫼르소는 자기 행동의 이유를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뫼르소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뫼르소는 주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나 말에 대해 어떠한 해석이나 이해도 하지 않는다. 무관심하기 때문에 위로를 하려 하지도 않고 섣부른 공감 하려 하지도 않는다. 뫼르소에게 무관심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다. 가령 개를 잃어버린 사람이 "개가 어떻게 될까요? 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는 물음에 레몽은 위로의 말을 전하지만 뫼르소는 "며칠 개를 묶어놓았다가 살처분 할 것입니다."라고 개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사실만 답할 뿐이다.
뫼르소의 삶의 방식이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뫼르소는 정말 있는 그대로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해석을 한다. 당사자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니 재판장에서 사람들은 피해자와 피의자를 제외하고 자기네끼리 이런저런 해석을 한다. 심지어 재판은 피해자인 아랍인에 대한 언급은 없고 뫼르소의 어머니 죽음에 대한 재판인 양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도 한다.

 결국 이야기는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이지만 본질은 이해하지 못할 뫼르소의 행동에 대한 재판이다. 즉, 무관심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소극적인 표현에 대한 재판이다. 사형을 구형 받았으나 뫼르소는 계속 소극적으로 표현하고 무관심과 무기력해 보이는 행동을 보이지만 마지막 순간 뫼르소에게 너는 아무 것도 모르며 눈이 먼것 뿐이다 라고 말하며 뫼르소의 편을 자처하는 신부에게 무언가 말을 와다다 하고 토해낸다.

 

 

 

 


 뫼르소는 따뜻한 무관심. 즉 무차별을 윤리, 삶의 형식이라고 믿고 있다. 뫼르소는 적게 말하고, 있는 그대로 말하며 차별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뫼르소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득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다른 의미를 부여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뫼르소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묻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저 받아들일 뿐. 그런 뫼르소가 처음으로 무언가 토해내는 것은 신부가 뫼르소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의를 부정당했기 때문에 뫼르소는 처음으로 타인(신부)에게 자신의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뫼르소를 보고 요즘 사람들이 보이는 행태라는 것이 이런 점이다.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점. 어찌 보면 냉혈한처럼 보일 수 있는 무관심이다. 그러나 삶은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기에 따뜻한 무관심으로 살아가기에는 어렵다. 타인과 생활하다 보면 몰이해를 가지고 갈등이 발생한다. 따뜻한 무관심으로만 살아가기엔 삶의 곳곳에는 길고 빈번한 재판이 너무나 많다.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배심원과 판사, 검사, 변호사와 함께하는 재판이다. 기존과 다른 삶의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뫼르소와 같은 요즘 세대들)이 점차 늘어난다 한들 다른 사람과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이해와 관심이 필요하다. 재판이 아예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재판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하였을 때 재판을 줄이고 사형수가 늘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뫼르소의 따뜻한 무관심과 차가운 관심의 중간 언저리가 필요할 것 같다.

무관심 혹은 무차별이 삶의 한 형식. 윤리의 한 형식이라고 믿는 사람.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 이방인이다.
알베르 카뮈 - 이방인 ★★★★







나누고 싶은 것들
1. 무관심 혹은 무차별
2. 뫼르소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점은?
3. 뫼르소와 같은 무관심을 가진 경험 혹은 무관심을 가진 사람을 만나본 경험
4.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첫 문장
5. 경험의 심오함은 결국 무용인가?
6. 살라마노와 강아지
7. 마리, 레몽
8. 어머니가 죽은 날짜, 나이도 모르는 모호성
9. 모든 것이 무관할 수 있을까?
10. 내가 믿는 윤리, 삶의 형식

2019 - 작성
2022.09.13- 1차 탈고
2024.04.01 - 2차 탈고

22.09. 13.추가 : 1차 탈고를 하기 위해 3년 만에 글을 들여다보니.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따뜻한 무관심? 요즘은 그런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대부분 냉소적인 무관심이다. 나의 무리, 나의 방식, 나의 삶으로 해석하고 타인에게 공감하거나 이해하거나 위로해주지 않는다. 집단 안이나 나와 비슷하면 따뜻한 관심이 되지만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냉소적인 무관심이 된다. 삶이 좀 다 다양해졌지만 그만큼 공통분모는 계속 줄어들기에 생기는 현상일까. 시대를 통괄하는 공통의 정서 문제일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좀 더 자주 어울려야 된다. 그래야 나아지지 않을까.

 

24.04.01 추가 : 1차 탈고 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은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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