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이 어려운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 중 하나가 문화 차이 같다. 과거 관습이나 생각, 물건,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은 현대와 많이 다르다. 그 차이 때문인지 과거 혹은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고전소설들은 어렵게 느껴진다. 가령 오만과 편견이라는 책을 보면 주인공들은 가난하다면서도 하인을 두고 여름이면 별장에 놀러 간다. 돈이 없어도 빚을 내서 하인을 부리고 때마다 파티를 연다. 지금에 보면 돈이 없다면 당장 사치품부터 줄이는 것이 상식이지만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들은 귀족사회 문화 때문에 가난하더라도 빚을 내서 하인을 부리고 파티를 연다. 물론 이게 책에 중요한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무시하고 봐도 상관은 없지만 이런 차이가 거슬리기 시작하면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에 집중이 어렵다.
그렇다고 그 의문을 해소하자고 당시 사회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할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저 계속 읽어보는 수 밖에는 없는 것 같다. 계속 읽고 읽다보면 이해도 쌓이지만 문화나 상대적인 차이가 소설에 중요하지 않다는게 읽다보면 느껴진다. 결국 소설이 이야기하고 싶고 궁금해 하는 것은 사람의 본질이나 사람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본질에 집중해 읽다보면 문화적인 차이나 시대의 차이는 그리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이 온다. 내 생각에 현대에 고전소설이라 불리는 것들을 시대와 무관하게 언제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인문학적인 주제를 이야기에 잘 녹여서 풀어쓴 것들이다.
테드 창의 숨은 고전소설의 반열에 오르기엔 너무나 최근에 나온 책이긴 하지만 숨은 고전소설이라 불리는 것들의 이야기를 오마주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인문학적인 주제를 잘 담은 것 같다. 고전소설이 어렵다면 테드 창의 숨을 먼저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책에는 총 9개의 단편이 나온다.
그 중 한 가지만 소개해보자면 '사실적 진실과 감정적 진실'이다. 이 단편은 미래에 '리멤'이라는 물건으로 사람들이 모든 기억들을 다 기록하고 과거의 기억들을 언제든지 열어볼 수 있는 세계의 이야기와 과거를 배경으로 아프리카로 보이는 한 부족 소년이 외지인을 통해 글쓰기를 배우는 이야기를 교차 서술한 단편이다.
단편에서 리멤과 글쓰기는 같은 것을 의미한다.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불확실하다. 망각이 인간에게 축복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슬픔과 고통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망각하기에 저지르는 실수들이 많다. 과거 자신의 발언과 행동, 잘못, 거짓말 등이다. 인간은 망각하기에 살아가고 망각하기에 계속해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다. 작가는 여기서 만약 인간이 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이라는 의문에서 이야기를 출발한다.
'사실적 진실과 감정적 진실'에서 미래의 사람과 과거의 사람들은 각자 리멤과 글쓰기라는 매개체로 과거를 전부 기억한다. 과거를 모두 기억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갈등을 빚는다. 그 갈등은 사람들 간에 무언가 분쟁이 발생했을 때 과거를 끄집어 내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다.
관계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과거를 떠올린다. 그 진실을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굳이 선한 이유를 꼽자면 현재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의 추구를 통해 현재의 잘못을 바로 잡기보다는 보통 자신이 정당하며 틀리지 않았다는 당위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쓸 때가 대부분이다.
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 과거를 꺼내놓고 이야기하면 정확한 진실을 담은 무엇가가 튀어 나온다. 여기서 상황은 몇 가지로 갈린다. 좀 더 정확한 진실과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상대가 다른 상대에게 "네가 말한 것은 거짓이고 너의 기억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며 감정적 갈등으로 번지는 상황. 다른 상황은 정확한 진실이 나왔으니 서로가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차이와 비교하여 인정하고 현재의 잘못을 바로잡자라고 타협하는 상황. 혹은 둘 다 모두 인정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다투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두 번째 상황을 원하겠지만 대부분 첫 번째나 세 번째 상황으로 흐르게 된다. 현재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진실 추구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 사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갈등 상황에서 과거의 기억을 꺼내어 따지고 상대방의 오류를 인정받는 것이 중요할까? 만약 상대방이 오류를 인정한다면 그 인정을 받아낸 상대는 무엇을 얻는 걸까? 내가 정확했다는 진실? 당신은 틀렸고 나는 옳다.라는 생각?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정확한 진실은 분명히 다르다. 보통 사람들은 상대가 정확한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나중에 정확한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났을 때 분노가 들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 차이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한 사람도 나중에 그것이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을 때는 인정하고 바꿀 줄 아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책에서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리멤과 글쓰기 때문에 많은 갈등 상황이 일어난다. 모든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책임 소재를 항상 분명히 하고, 갈등이 해결되기 보다 누군가 한 명이 패배하고 다른 사람이 승리하는 쪽으로 끝이 난다. 그럼에도 '모든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라고 주인공은 생각한다. 갈등 상황에서 진실 추구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진실 추구를 위해 주인공은 계속 글쓰기를 하고 사람들에게 진실이 이 종이에 있다고 리멤에 있다고 소리친다. 여기서 주인공에게 부족의 노인이 이야기를 하나 해준다.
과거 부족에는 미미와 보우라는 것이 있었다. 미미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 보우는 정확한 진실이다. 관계에서 갈등 상황이 일어난다면 아프리카 부족들은 그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인물 앞에서 미미를 말한다. 그리고 제3자 혹은 다른 매개체를 통해 보우를 가린다. 보우를 가리게 되면 미미를 이야기한 두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여기서 감정적 갈등은 전혀 없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말했을 뿐 그것이 곧 악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진실은 중요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뿐이니까.
노인은 주인공에게 정확한 진실의 추구에 대한 의미를 묻는 것이다.
나도 평소 생활을 하다 보면 갈등을 빚을 때가 많다. 그때마다 보통 과거를 들추어 서로를 힐난할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이미 쏘아진 화살에 대해 누가 쏘았는지 가지고 이야기하지 말자. 그 쏘아진 화살을 어떻게 빼낼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누가 쏘았던 이제 다음에는 쏘지 말자." 물론 나도 이 말을 지키지 못하고 누가 쏘았냐 가지고 힐난할 때가 많지만 끊임없이 진실 추구의 본질을 흐리지 않도록 되뇐다.
테드 창은 9가지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에도 되풀이되었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말한다. 다른 사람이 나의 글을 읽는 행위로 죽더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테세우스의 배나 더미의 역설로 볼 수 있고 인공지능에게 헌신하는 사람은 과거 사랑과 희생에 대해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팩트야? 라는 말을 자주 한다. 물론 팩트가 중요하다.
갈등과 대화에서 마땅히 허구나 거짓은 없어야 하고 진실만이 있어야 하지만. 때론 진실이 항상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대화의 목적은 감정 교류고 갈등 상황에서 궁극의 목적은 갈등해결이기 때문이다.
숨 - 테드 창 ★★★
나누고 싶은 것들.
1. 대화의 가치
2. 옳은 것과 정확한것의 차이
3. 과거를 바꾸고 싶은가?
4. 테세우스의 배, 더미의 역설
5. 동물을 키우고 싶어하는 욕구
6.자유의지에 대해 '개인이 어떤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하려면 똑같은 상황에서 그와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7. 우리는 우주의 중심인가?
8. 누군가를 키운다는 것에 대한 거창하고 일상적이며 불가피함에 대한 다양한 것들
9. SF과학 소설
10. 내가 생각하기에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되풀이 되고 있는 주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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