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를 잃은 우리는 무엇으로 그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시중에는 상실에 대한 연구와 학술 서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기만 해도 상실의 5단계를 이야기하며 상실에 대한 인간의 내면을 설명하는 글들이 많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상실이 연구와 학술 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실은 상실을 겪어본 사람만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기에 상실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상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상실을 겪어본 사람일지라도 상실을 겪은 사람 각각의 이야기는 다르기에 완전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때문에 상실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정의를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위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부분이다.
상실감은 극복이 가능한 걸까? 상실이란 무엇이고 상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까?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세 개의 챕터 '집을 잃다', '집으로',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챕터의 각 주인공 격인 세 인물은 모두 최근 상실을 겪은 사람이다. 얀 마텔은 이 세 인물의 여정에서 상실과 종교, 감정에 대한 이야기 한다.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종교와 어우러지게 이야기하지만 종교에 대한 책은 아니다. 비록 작가 개인이 파이 이야기 때부터 종교 혹은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책은 상실(고통) 후에 무엇이 남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보인다.
[스포 주의]
1부 집을 잃다 에서 토마스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잃었다. 그는 신(어떤 특정 종교의 신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편의상 책에는 기독교를 들었을지라도)이 자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죽이고 도둑질을 해갔다고 생각하여 신에 대한 반기로 뒤로 걷는다. 뒤로 걷는 이유가 신에 대한 분노와 반기이자 절망감의 표출인 것이다. 그런 그는 어느날 신에게 반기를 드는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를 읽고 그가 말한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있는 신과 관련된 성물을 찾으려 마음을 먹는다. 그 성물이 진짜 신의 물건인지 혹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통해 신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고 상실감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성물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토마스는 성물을 찾으러 자동차를 타고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고된 여정 끝에 포루투갈의 높은 산에 도착한 토마스는 도착하자마자 불의의 사고로 한 아이를 차로 치여 죽게 만든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신의 궁금증이 먼저였기 때문에 차에 치여 쓰러진 아이를 외면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물을 찾아 도망친다. 신이 자신의 아이와 아내를 훔쳐 간 것처럼 그도 신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아이를 훔쳐 간 것이다. 신을 도둑으로 생각했던 그는 이제 도둑질의 피해자이자 도둑이 됐다. 그리고 그렇게 도둑이 된 토마스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성물을 찾는다. 사람들이 숭배하고 성스럽게 여기던 그 성물은 십자고상이었다. 그런데 십자고상을 자세히 살펴보던 토마스는 십자고상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신이 아닌 털북숭이의 유인원 모습인 것을 발견한다. 토마스는 그것을 보고 웃음이 터져 크게 웃으며 조롱한다.
고작 침팬지라니. 사람들이 그렇게 숭배하던 것이 고작 침팬지라니. 신이 고작 침팬지 따위였다니.
그는 사람들이 그토록 숭배하고 따르고 있던 신의 물건이자 신의 상징이 사실은 침팬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어 한다.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강탈해간 신이 고작 유인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십자고상으로 숭배되고 있다고 세상에 널리 알림으로써 신이자 도둑을 조롱하고 싶었던 것이다. 교회 밖으로 나와 십자고상의 정체를 알리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다시 돌아가려는 순간. 토마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토악질을 하며 자신이 역겨워짐을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신을 찾는다.
2부 집으로에서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병리학자이자 무신론자인 에우제비우가 나온다. 그는 어느 날 밤 죽은 아내를 만나는 기이한 경험을 하고 난 후 1부에서 죽은 아이의 가족으로 나오는 마리아라는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는 남편의 죽음이 이상하다며 남편의 시체를 들고 와 에우제비우에게 부검을 맡긴다. 그러곤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와 아들이 죽고 난 후 남편이 뒤로 걸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1부의 토마스와 똑같이 상실을 겪었지만 마리아와 마리아의 남편이 행하는 태도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마리아의 남편이 뒤로 걷는 이유는 신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상실에 대한 아픔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행동이다. 에우제비우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남편의 시체를 부검한다. 남편의 시체에서는 피나 장기, 배설물들이 나오는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토사물과 여러 가지 물건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참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에우제비우는 마리아 남편의 시체 안에는 침팬지 한 마리와 작은 곰 인형을 발견한다. 남편의 몸에서 나온 물건들을 본 마리아는 모든 물건들을 가방에 담고 남편의 시체에 누운 후 에우제비우에게 봉합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2부의 내용은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고 몽환적이다. 이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남편의 상상인지 조금 모호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실제로 시체가 남아있다는 점과 가방이 남아있다는 점이 오롯이 상상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3부 집에서는 피터 토비라는 남자가 나온다. 이 남자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상실감에 슬픔에 빠져있다 오도라는 침팬지를 만나게 된다. 그는 침팬지를 좀 더 잘 돌보기 위해 캐나다를 떠나 포르투갈로 간다. 포르투갈에서 오도와 생활하며 피터는 과거 상실감을 벗어나 점점 현재를 살아감을 느낀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 오롯이 현재를 살 수 없던 피터는 현재에 충실하고 지금에 집중하고 있는 오도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오도와 살며 점점 상실감을 회복하던 피터는 오도와 살고 있는 집이 과거 자신의 조상이 머물렀던 집임을 우연히 알게 된다. 피터는 이 모든 우연이 그저 우연이 아님을 느낀다. 그리고 그 이후 갑작스러운 오도의 이상한 행동과 이끎에 따라 피터는 오도를 따라 가파른 바위로 올라가 신비로운 동물로 여겨지는 코뿔소를 보고 그대로 숨을 거둔다.
오도는 그런 피터를 뒤로하고 어디론가 떠난다.
1부 집을 잃다에서 2부 집, 3부 집으로의 3 인물들은 전부 연결이 되어 있다.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조금의 영향을 주었으니 연결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똑같이 상실을 겪은 사람들로서의 연결도 있다. 이 책의 제목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상실을 겪은 후 그들을 이끄는 장소다. 그리고 각 챕터의 제목은 상실 혹은 고통 후에 그들에게 남는 것을 말한다.
1부 집을 잃다에서 토마스는 집으로 비유되는 무언가를 잃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역겨워짐을 느낀 것은 상실을 당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상실을 일으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도둑질의 피해자이자 도둑이다. 자신에게 상실감을 준 신이 침팬지 모습을 하고 있다며 조롱하고 싶지만 결국 조롱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상실 후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그는 신을 조롱하려 했지만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상실을 주었다.
'신이라고? 결국 침팬지 모습이잖아 너는 동물이다'라고 토마스는 말하고 싶었지만 동물은 토마스였다. 그는 이 여정에서 상실을 극복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무언가를 잃었고 누군가에게 상실을 주며 그토록 자기가 비웃고 싶었던 신이자 침팬지가 자기 자신임을 깨달았다. 마지막 순간 자기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끼고 울분을 토해낸 건 자신의 오만함과 이중성에 역겨워 신에게 용서릴 빌고 기대고자 울부 짖은 것이다.
2부 집으로에는 성스러움에 대한 것이 등장한다. 무신론자인 주인공이 죽은 아내와 만나는 것부터 마리아의 남편을 부검을 하며 경험하게 되는 신비한 일 모두 성스러움의 경험이다. 인간의 죽음을 병리학적으로만 보았던 에우제비우는 성스러움을 경험을 한다. 집이라는 것은 에우제비우의 집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고 마리아의 집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남편의 시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공교롭게 에우제비우의 부인 이름이 마리아이고 에우제비우를 찾아온 여인의 이름도 마리아이기 때문에 이 둘을 같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떠한 마리아든 마리아에게 집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편 시체 안에 있던 침팬지와 작은 곰으로 비유되는 남편과 아이의 품으로 들어가려고 시체에 누워 에우제비우에게 봉합해 달라고 한 것이다. 2부에서의 상실이 극복되었느냐? 이는 극복되었다고 볼 수 도 있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극복이라는 것이 상실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 상실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고, 극복이라는 것이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면 상실감은 극복이 된 것이다.
2부를 상실감이 극복되었다고 보았을 때 결국 이 모든 이들을 집에 있게 하였으니 얀 마텔이 말하는 신은 성공한 셈이다. 에비제비우는 상실 후에 성스러운 경험을 통해 신 혹은 성스러움을 깨달았다. 아마 그가 잠에서 깨어나게 되면 에비제비우는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변할 것이다.
3부 '집'이 하이라이트다. 신은 피터 토비를 침팬지 오도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게 만든다. 현재에 충실하라. 현재를 살아가라는 것을 그대로 실현시켜준 것이다. 그리고 피터는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마지막 순간에 코뿔소로 비유되는 성스러움을 발견하고 편안하게 영면에 든다. 후에 오도는 어디론가 사라지는데 아마도 또 다른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을 찾으러 가는 것처럼 보인다. 3부에서 '집'이란 결국 현재를 살아감, 성스러움 혹은 신의 품으로 보인다. 피터 토비는 상실 후 그 극복을 신을 통해 현재를 살아감으로 극복하며 성스러움을 경험했고 그 결과 신에게 닿아 영원한 상실의 극복을 이룬 것이다.
얀 마텔은 상실의 극복과 상실 후에 남는 것을 성스러움 혹은 종교적인 것과 연결을 시켰다. 종교는 잘 모르지만 느낀 건 인간은 고통 후에야 무언가 깨닫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피가 나고 살이 쓸리는 고통 후에야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다. 얀 마텔은 이런 내용을 종교적인 내용과 여러 가지 은유로 말한다.
1부, 2부, 3부의 세 주인공은 상실 혹은 고통을 통해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다. 만약 상실이나 고통이 없었다면 이 세 주인공들은 평생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 교훈에 인간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피가 있어야 한다. 살이 째지고 피가 흐르는 고통이 있은 후에야 인간은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다. 인간을 깨닫게 만드는 것은 좋은 스승도, 좋은 책도, 좋은 말도, 좋은 환경도 아니다. 고통이다. 고통이 있은 후에야 인간은 비로소 깨닫는다. 고통이 없는 깨달음이란 허망하고 헛되다.
[어벤저스 엔드게임 약 스포가 있음]
이 책을 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보았다. 여기서 악당으로 나오는 타노스는 이전 작 인피니티 워때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인피니티 워 때 타노스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인다. 타노스의 정의가 옳고 그름을 떠나 그는 그의 사리사욕과 상관없이 정의를 지키기 위해 구도자의 행보를 보인다. 그러기에 그는 어벤져스의 멤버들을 이기고 그의 정의에 따라 세상의 절반을 없앤다.
반면 엔드게임에서의 타노스는 인피니티 워때와는 다르게 순수한 악당으로만 보인다. 이 둘의 차이는 상실 혹은 고통이 수반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의 차이다. 인피니티 워때 타노스는 사랑하는 딸인 가모라를 잃었다. 그 상실을 통해 타노스는 깨달음을 얻고 신념을 가지고 구도자로서의 행보를 보인다. 이때 타노스는 어벤져스 멤버들을 조롱하지도 않고 그저 자기와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는 대상으로 보고 존중하며 자신의 신념(세상의 절반을 없애는)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엔드게임에서의 타노스는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 깨달음을 얻은 상태다. 그러기에 이때의 타노스는 어벤져스 멤버들을 위대한 과업을 몰라보는 우둔한 자로 무시하고 자신의 신념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절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모두 없애고 새로이 세상을 창조하려 한다.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 교훈에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 보았을 때 타노스가 엔드게임에서 패한 이유는 고통이 없어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반면 어벤져스 멤버들이 승리한 이유도 블랙 위도우의 희생이라는 고통이 있었기에 깨달음을 얻어 승리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상실을 겪은 우리는 상실감을 극복하게 될까?
상실을 겪은 자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상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무엇이 상실의 극복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결국 상실을 극복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상실을 겪은 자에게 남는 것은 깨달음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깨달음을 얻게 된다. 돌이켜보면 종교에서 성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나 성공한 운동선수, 유명한 학자들 등등 무언가 깨닫거나 성공한 사람들은 상실 혹은 작은 고통이 있은 후에 이 모든 것을 얻은 것 같다. 흔한 영화나 어린이 만화영화의 메타포도 주인공이 무릎을 꿇고 절망을 한 후에야 한차례 성장하지 않는가. 나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기에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없어 오늘도 책을 읽는다. 그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고 상상하며 깨달음을 얻으려 노력한다.
얀 마텔 - 포르투갈의 높은 산 ★★★
나누고 싶은 것들.
1. 종교
2. 고통 없는 깨달음도 있을까?
3. 코뿔소, 침팬지, 포르투갈의 높은 산 등 여러 가지 은유들
4. 인간의 상실감은 극복될 수 있을까?
5. 왜 진실은 허구라는 도구를 쓰려할까?
6. 울음
7. 상상의 완성
8. 집
9. 죽음이라는 것에 자연사는 없는가? (2부의 내용을 빌려)
10. 인간은 왜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가?
2019.04 - 작성
2022.08.26 - 1차 탈고
2024.04.01 - 2차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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