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리뷰 & 해석

영화 리뷰&해석. 중경삼림 - 왕가위 | 서로의 불안을 보듬을 수 있는 사랑이란

by 까망북클럽 2024. 5. 8.
반응형
 
중경삼림
1994년 홍콩,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만우절의 이별 통보가 거짓말이길 바라며 술집을 찾은 경찰 223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술집에 들어온 금발머리의 마약밀매상 "그녀가 떠난 후 이 방의 모든 것들이 슬퍼한다"여자친구가 남긴 이별 편지를 외면하고 있는 경찰 663편지 속에 담긴 그의 아파트 열쇠를 손에 쥔 단골집 점원 페이네 사람이 만들어낸 두 개의 로맨스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방법에 대한 독특한 상상력
평점
8.4 (1995.09.02 개봉)
감독
왕가위
출연
임청하, 양조위, 왕페이, 금성무, 주가령, 진금천, 황지명, 좌송승, 관리나, 양진

 

 

 모든 로맨스가 그렇듯 남녀 관계는 엇갈림과 오해가 있다. 그런 엇갈림과 오해 끝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쌀로 밥을 짓는 것 같다. 그럼에도 중경삼림에는 무언가 특별함이 느껴진다.

 

영화를 보고 기억나는 것을 꼽자면  만남, 머묾, 떠남, 다시 만남. 상대의 등을 쳐다보는 사람. 스침 정도다.





 중경삼림에 등장하는 인물 중 페이를 제외하고 233이나 633, 노랑머리, 스튜어디스, 가게 사장은 제대로 된 이름을 알 수 없다. 모두가 존재감이 흐린 개인에 불과하다. 홍콩이라는 배경에서 이 개개인들은 찰나의 순간에 스쳐 지나갈 뿐 서로에게 의미를 주지 않는다. 영화는 시작부터 2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부분까지 핸드캠으로 어지럽게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반복하며 찰나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 찰나의 순간. 스쳐지나가는 순간에서 운명이 되고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가는 것이 이 영화의 전반이라고 할 수 있다.

 

 

1부


 이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눌 수 있다. 1부에서 경찰인 233은 애인에게 버림받은 후 애인이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서 모은다. 그것도 유통기한이 5월 1일까지인 통조림만 사서 모으는데, 그날은 233의 생일이자 233이 결정한 이별의 날이다. 그전까지 애인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여지없이 시간은 지나고 4월 30일 밤이 다가 온다. 233은 그날 밤 그간 모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두 먹어 치운다. 홍콩의 어느 음식점에서 주야장천 애인을 기다리거나, 좋은 일이 있으면 항상 애인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했던 것처럼 유아기적인 행동에서 기인한 이별 방법이다. 방법이야 어찌 됐든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으로 인한 여러 상념은 233을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만들어준다. 시간은 흐르고 음식의 유통기한이 지나듯 감정의 유통기한도 사랑의 기한도 결국은 지나간다. 유통기한이 정해진 통조림으로 233은 감정도 사랑도 자신의 뜻대로 어찌할 수 없으며 인생도 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영화 초반 233을 스쳐가는 마약운반책인 노랑머리는 아주 찰나의 시간에 233을 스쳐 지나가지만 그때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그저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익명의 개인일 뿐이다. 노랑머리는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홍콩의 도시에서 인도인을 통해 마약 운반을 하려다 운반책인 인도인들이 사라져 곤란을 겪는다. 소중한(?) 마약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그녀의 전 애인이자 마약중개상으로 보이는 백인에게 5월 1일까지가 유통기한인 통조림을 타인을 통해 받는다. 233과 마찬가지로 이별의 날이자 실수를 돌이킬 마지막 기회의 기한인 것이다. 처음 노랑머리는 마약을 되찾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다른 인도인을 협박하기도 하지만 이내 쓸모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지막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어느 술집에 들어간다. 그때 233이 그 술집에 있었다. 233은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여러 여자에게 연락을 돌렸지만 실패하고 술로 이별의 아픔과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서 술집에 간 것이다.  그러나 233은 술을 아무리 먹어도 이 외로움과 아픔을 어찌할 수 없음을 느끼고 지금부터 바에 가장 처음 들어오는 여자와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이 장면은 마치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는 듯한 느낌도 났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노랑머리다. 233은 귀엽게 노랑머리에게 추근덕 거리고 말을 건다. 그러면서 계속 파인애플을 좋아하냐고 묻는다.

 

233 : 혹시 파인애플 좋아해요?
노랑머리 : 내가 파인애플을 좋아하는지 왜 궁금하죠?
233 :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으니까요. 5년 동안 사귀던 여자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차였어요. 내가 자기를 이해해주지 않는데요. 그래서 당신을 이해해보고 싶어요
노랑머리 : 날 이해하지 못할걸요
233 : 당신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대신 당신이 나를 이해하면 되죠.

노랑머리 독백 : 사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 큰 의미란 없다. 사람은 변하니까 오늘은 파인애플을 좋아하는 사람이 내일은 다른 걸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

 

 


 서로 스쳐가던 길거리에서 나란히 앉는 술집 그리고 둘만의 호텔까지 둘은 점점 더 거리감을 좁혀간다. 그러나 둘은 겉돌뿐 서로를 보듬지 못한다. 노랑머리가 잠든 침대 옆에서 233은 그녀에게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혼자 네 끼의 식사와 두 편의 영화를 본다. 그리고 날이 밝자 노랑머리의 신발을 벗겨주고 호텔에서 떠나 끝없이 운동장을 돌며 땀을 흘린다. 흠뻑 땀을 흘리고 모든 것을 떨쳐버리는 의미로 삐삐를 두고 운동장을 떠나려 하는 순간 233은 삐삐에 온 노랑머리의 생일 축하 인사를 듣고 밝게 웃으며 삐삐를 다시 들고 어디론가 뛰어간다.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233에게 삐삐를 하기 전 노랑머리는 마약중개상이자 전 애인으로 보이는 백인에게 찾아가 그를 총으로 쏴 죽인다. 그리고 영화 내내 쓰고 있던 노란색 가발을 던져버리고 사라진다. 영화 내내 불안감 때문에 비옷과 선글라스 그리고 노란색 가발을 쓰고 있던 노란머리는 비로소 불안감을 던져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후 233과 노란머리의 사랑이 성사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스쳐갈 뿐이던 익명의 우연들이 서로를 만나 의미를 만들고 운명으로 발전한 것이다.

 

 

만약 기억을 통조림이라고 친다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

 

 

2부

 




 양조위가 등장하는 2부도 1부의 맥락과 비슷하다. 경찰인 633(양조위)은 패스트푸드점에서 페이를 처음 만난다. 페이를 처음 만났을 당시 633은 애인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이미 페이는 633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갖는다. 영화는 같은 장소에서 페이의 옷이 바뀌는 것으로 시간을 빠르게 돌리고 사장과의 대화로 633이 애인과 헤어지는 중임을 알려준다. 2부의 제대로 된 시작은 633이 스튜어디스인 전 애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직후다. 633은 패스트푸드점에 갔다가 페이로부터 편지를 건네받지만 읽지 않고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시며 허공을 바라보는 633. 그런 그를 쳐다보는 페이. 그 둘을 정적으로 배치해놓고 어지럽게 오고 가는 행인들의 모습은 감각적이면서도 아련하다. 결국 편지를 읽지 않고 두고 간 633은 집에서 전 애인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비누와 낡은 걸레, 인형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애인이 두고 간 옷을 다리며 외로움을 달랜다. 그녀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미련. 익숙한 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안주하려는 마음에 기인한 행동이다. 반면 페이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633과 우연히 마주친 후 그에게 선뜻 여행을 같이 가자고 할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쉽게 떠나는 사람이다.

 

페이 : 돈을 모으려고요.
633 : 공부하려고요?
페이 : 생각해본적없어요 난 인생을 즐기고 싶어요
633 : 어디서요
페이 : 어디든 상관없어요 캘리포니아라든가.. 
633 : 캘리포니아가 즐기기 좋아요?
페이 : 몰라요 재미없으면 다른 데 가죠. 
633 : 여행좋아해요?
페이 : 안 좋아하세요?
633 : 난 가도 안 가도 그만이에요.
페이 : 그럼 같이 여행해요 나 돈 많이 모았거든요.
633 : 다음에 얘기해요.

 

 

 



 페이는 633에게 완전히 반해 그의 집에 있는 꿈을 꾼 후 633의 집에 틈입하며 집을 조금씩 바꿔 놓는다. 물고기를 새로 채워놓기도 하고 거의 다 쓴 비누를 새것으로 바꾸기도 하고 새 슬리퍼를 몰래 숨겨놓기도 하고 낡은 걸레를 바꾸기도 한다. 마치 633의 마음을 환기시켜 주려는 듯 미련과 여러 감정으로 가득한 집을 조금씩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페이는 633의 집에 몰래 가던 일을 들키게 되고 633은 비로소 자신을 향한 페이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서로 엇갈리던 둘의 감정이 드디어 하나가 된 순간 633은 새로운 비행을 위해 집안을 대청소하고 페이는 연신 즐거운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633은 약속대로 저녁 8시 캘리포니아 펍에서 페이를 기다린다. 그러나 페이는 나타나지 않고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던 633은 그녀가 캘리포니아 펍이 아닌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633은 페이가 남긴 편지를 버리려다 다시 주워 읽는데 편지는 목적지가 적혀있지 않고 날짜만 1년 후로 적혀 있는 비행기 티켓을 흉내 낸 형태다. 이후 633을 바람 맞히고 캘리포니아로 떠난 페이의 행적이 나온다.

 

비가 몹시 내렸다.
유리창 너머로 비 오는 캘리포니아 펍이 보였다.
문득 다른 캘리포니아의 날씨는 화창한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내게 1년이란 시간을 주었다.

 

 

 1년 후 페이는 다시 패스트푸드점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633은 경찰을 그만두고 패스트푸드점을 인수하여 재개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둘의 만남은 둘이 처음 만났을 때 들렸던 "california dreaming' 이 가득하다. 633이 목적지가 없는 비행기 티켓 모양의 편지를 들어 보이자 페이는 티슈를 새로 꺼내 새로운 비행기 티켓을 그에게 선물한다.  "어디로 가고 싶어요?"라는 페이의 물음에  "아무 곳이나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라고 633은 대답한다. 

 

 

 

 

페이는 왜 떠났을까?

 

 

 둘의 마음을 확인했음에도 페이는 왜 떠났을까? 그건  633에 대한 불안 그리고 둘의 관계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633의 전 애인인 스튜어디스와 마찬가지로 페이도 정처 없이 여러 군데를 떠도는 사람이다. 반면 633은 안주하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다. 페이는 자신과 성향이 반대인 사람과 이별을 한 차례 겪은 633이 전 애인과 성향이 비슷한 자신과 잘 지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 오는 캘리포니아 펍(633의 과거)을 보며 다른 캘리포니아(자신과의 미래)의 날씨가 궁금했던 거다. 만약 633이 페이가 떠난 이후 바뀌지 않고 정체했다면 둘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633은 페이가 떠난 후 미련쟁이에 안주하던 삶을 벗어던지고 페이와 마찬가지로 변화하는 삶의 자세로 바뀐다. 그 증거가 바로 안정적인 경찰이라는 직업을 벗어 던지고 패스트푸드점일 인수한 일이다.

 

633에게 새로운 비행기 티켓을 선물하는 이 달달한 결말은 그동안 엇갈렸던 둘을 하나로 봉합한다. 1부와 2부의 달콤한 결말을 통해 중경삼림은 불안하고 복잡한 일상. 익명의 개인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기 바빴던 우연을 운명과 낭만적 일상으로 바꿔 버림으로 현실에 지친 관객들에게 위로를 전달한 것이다.

 

 요즘 2030 세대가 이 영화를 보고 열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영화가 개봉했던 1995년도의 젊은이들처럼 지금의 젊은이들도 모종의 불안감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감이 흐릿해져 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나 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위로받고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 주고 싶어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응형